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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딸에 대하여 후기

 문득 안락사를 떠올리다 

영화의 원작인 김혜진 작가님의 동명의 소설을 몇 년 전에 읽어 보았다.

조금 오래된 기억이어서 소설의 내용이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으나 여자를 좋아하는 딸을 대하는 어머니의 이야기였던 것만큼은 기억한다. 티빙 영화에 올라와 있길래 호기심에 감상해 보았다. 무언가 찬란 배급이라고 하면 신뢰부터 가기 마련이다. 

그렇게 영화를 보았고 소설에 대한 기억이 이상하리만치 되살아나진 않았으나 영화 자체는 만족스러웠다. 

근래 본 영화 중 의미적으로나 재미로나 손에 꼽을 만한 수작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안락사에 대해서 생각을 진지하게 다시 해보게 되었다. 

서구권에서는 이미 도입한 나라도 많고 진지하게 논의 중인 곳도 많으나 우리 나라는 정치권에서는 국민들 눈치 보느라 아무도 이야기를 꺼내지 못 하고 있고 가끔 누군가 허공에 대고 안락사에 대한 이야기를 해도 크게 공명을 울리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기 보다는 그 누구도 섣불리 꺼내기 어려운 주제가 아닐 수 없다. 

아직까지 이게 한국 사회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다른 의미로 흥미롭다.

서구권 특히 유럽에서 안락사 허용을 많이 하고 논의가 활발한 건 다른 무엇보다 유럽의 고령화가 심각한 수준이기 때문이 더 크다. 정치권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 들이고 법을 만들었다는 거 자체도 어찌 보면 국민들의 지지에 근거해서 라고 할 수 있다. 정치인들은 국민들이 받아 들이지 않으면 애초에 법안을 만들 생각조차 하지 않기 때문에 유럽 여러 나라들의 국민들이 기본적으로 안락사에 대한 열망이 어느 정도 있다고 할 수 있다. 

국내에서는 자극적인 뉴스로 인해 어린 10대 우울증 소녀가 안락사를 받았다는 기사만 가끔 나오는 수준이지만 깊게 들여다 보면 늘어나는 노인 복지 비용과 안락사는 분리해서 생각해 보기 어렵다. 특히 일본같은 경우 안락사 논의가 나올 때면 그 누군가는 돈 없는 노인들이 안락사 1순위라는 식으로 이야기가 오가고 있기도 하다. 

특히 캐나다 에서는 정부 기관에서 장애인들에게도 안락사를 권해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 적이 있다. 

한 마디로 서구권에서 조차도 터부시되는 주제라고 할 만하다.

영화 딸에 대해서에 나오는 엄마는 요양보호사로 일한다.

나 역시 그 직업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나의 어머니도 요양 보호사로 몇 년간 일을 하셨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하시는 일에 대해서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래도 대충 무슨 일을 하는지는 이야기로 들어 알고는 있었기에 엄마의 직업이 생소하지는 않았고 우리 나라에서 일하시는 중년의 여성들이 대부분 요양 보호사로 일하는 건 그리 특이하거나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만큼 흔한 일이라는 말이다. 우리 나라도 일본 만큼이나 고령화 속도가 빠르기에 그러하다.

특히 아이는 안 낳고 고령화 속도는 갈수록 빨라지기에 아마 우리 나라는 일본보다 더 극심한 미래를 마주해야 할지도 모른다. 일본은 그래도 우리 나라보다는 상황이 좋은 편이었는데 모르긴 몰라도 우리 나라는 제반 여건이나 사회적인 인식을 생각해 보자면 일본보다 더 심각한 상황을 맞이할 게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대비도 너무 안 되어 있고 이웃 나라 일본을 보면서도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 안에서 엄마는 나름 유명하고 화려한 삶을 살았던 치매 걸린 노인 제희를 보며 자신의 미래를 본다. 직업적인 불안정성에 여자를 좋아하는 자신의 딸이 자신의 노후를 보장해 줄 거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많은 돈을 모아 놓은 것도 아니라 자신도 역시 나이 들고 병들면 제희와 다른 상황에 처할 거라고 쉽게 상상하기 어렵다. 

제희는 치매에 걸린 노인으로 제대로 된 거동도 하고 어렵지만 가끔 정신이 돌아와서 허망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기도 한다. 심각한 치매 수준이 아닌 중기 치매 정도로 볼 수 있는데 그래도 자신이 만든 재단에서 요양원에 후원을 해줄 때에는 인간적인 대우가 가능했으나 그러한 지원도 끊기는 마당에 더 이상 인간적인 대우는 꿈과 같은 일일 뿐이다.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되긴 하지만 엄마는 노인 제희를 본인의 집으로 데리고 온다.

가족도 없고 일가 친척도 없는 제희를 제대로 돌 볼 수 있는 사람은 엄마 뿐이다. 딸을 돌보던 엄마는 이제 또 다른 노인을 돌보면서 돌봄의 굴레 안으로 들어 간다. 그 덕에 노인 제희는 나름 행복하게 눈을 감았지만 엄마의 노년을 어찌 될 지 장담하기 어렵다. 나는 아직 죽을 나이는 아니고 아직 노인도 아니지만 내가 만약 치매인 상태라면 안락사를 해 달라고 부탁을 할 거 같다는 생각이 영화를 보는 내내 들었다. 

의사의 판단 아래 치매 중기가 넘어가서 내 스스로를 인지하지 못 하는 단계로 판명이 되면 안락사를 해 달라고 유언장에 남기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자신을 스스로 인지하지 못 하는 단계에서 몇 년 더 산다고 그게 인간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엄마의 태도가 이해가 가긴 하지만서도 그게 궁극적으로 노인 제희를 위한 길인지는 의문이다.

엄마의 욕심 아닐까. 

본인은 죽기 직전에 그렇게 대접받고 싶지 않다는 몸부림 정도로 읽혀지기에 엄마가 마더 테레사처럼 여겨지지도 않았다. 노인 제희에게는 누구보다 다정하지만 사회에서 갖은 차별을 당하는 딸 그린과 그런 딸의 애인 레인 앞에서는 그 누구보다 차갑고 냉혈한 사람이 바로 엄마다. 인간은 자신이 경험하고 아는 만큼은 이해할 수 있다는 게 바로 엄마를 통해서 여실히 드러난다. 

자신의 이해 범주 밖의 일은 이해하기도 싫고 실상 어렵다.

그러하기에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일이나 가치관에 대해서 온전히 이해하는 사람들은 남다른 감수성을 가진 것도 크지만 기본적으로 머리가 좋은 거라고 볼 수 있다. 

배려와 이해심은 애초에 지능에서부터 나온다. 

인간도 동물이다. 

모든 동물은 몸이 약해지면 야생의 세계에서 누군가에게 먹히거나 죽임을 당한다. 그게 자연의 섭리라고 할 수 있다. 벌레부터 사자까지 그러한 운명에서 벗어나기는 힘들다. 그런 자연의 섭리를 기술과 과학으로 이겨내고 있는 게 바로 인간이다. 동물 중에서는 유일하다고 할 만하다. 영생을 누리고 싶은 인간의 욕망과 과학 기술이 만나 지금에 이르렀다. 

아마 우리 나라도 노인 복지 예산이 부담스러워지는 순간을 온 국민이 느낀다면 안락사 이야기가 봇물처럼 나오기 시작할 테다. 안락사와 자살을 사실 정확하게 구별하긴 어렵지만 굳이 구별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다. 자신이 스스로의 삶을 마무리하고 싶을 때 사회적인 제도 안에서 하는 게 그렇게까지 나쁜 일일까. 

하루하루가 지옥처럼 다가오는 사람에게 목숨을 앗아가는 일 말고는 답이 없을 때 안락사나 자살이 과연 해결책이 아닐까. 

과학과 기술의 이기로 자연스럽게 늙어 죽는 게 불가능해진 요즘 시대에 과연 안락사는 대안이 될 수 없을까. 나는 될 수도 있다고 본다. 인간 만이 소중하고 인간의 생명 만이 중한가. 내가 죽음에 대해 가지는 가치관이 일반적이지 않을 수 있다고는 하지만 나는 우리 나라도 안락사에 대해서 논의 정도는 시작해 볼 수도 있다고 본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너무 안락사 이야기만 했는데 이 영화는 여자를 좋아하는 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누가 봐도 영화의 중심은 바로 엄마라고 할 수 있다. 엄마의 시선을 통해 세상을 바라 보며 엄마의 세상이 영화의 중심이다. 그러하기에 보는 사람 역시 엄마에게 공감하고 엄마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 볼 수 밖에 없다.

말이야 바른 말로 딸이 갑자기 엄마 혼자 사는 집에 들어오는 순간 민폐의 시작 아닌가. 아무리 급하다고 하지만 허름한 집이라도 들어갈 수 있을 텐데 사고 방식도 맞지 않는 엄마와 딸의 대립은 그래서 결국은 딸의 책임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만든 딸이 원망스럽다. 노인 제희를 내치지 못하던 엄마는 건방지고 자신 밖에 모르는 딸과 애인 역시 내치지 못한다. 

아마 영악스러운 딸도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다.

세상에 대한 정의 그리고 자신의 권리는 그 누구보다 잘 외치면서 엄마의 권리와 자유는 공기처럼 무시하는 딸이 나는 그래서 보는 내내 불편하다. 오히려 엄마의 눈치를 보는 건 딸이 아니라 딸의 애인 레인이다. 

그런 연유로 엄마는 딸의 애인이자 그나마 염치는 있는 레인을 통해 성소수자의 삶과 애환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게 된다. 딸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 들이기는 어렵지만 이들도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하나의 먼지같은 존재라는 걸 어렴풋이는 받아 들인다. 오히려 딸을 통해 성소수자를 보았다면 절대로 알지 못했을 진실을 딸의 애인을 통해서 꿰뚫어 보게 된다. 

어찌 보면 세상에 답은 없다. 

그래서 모두가 답을 내려고 하다 보면 소수자들은 어쩔 수 없이 피해를 보기 마련이다.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야지만 노후가 행복할 거라는 것도 어찌 보면 판타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나는 어쩌다 보니 노인들이 많이 사는 시골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었는데 명절날에도 찾아오지 않는 자식들이 생각보다 허다하다. 대부분은 찾아 오지만 자식이라고 해서 부모를 부양하고 신경 써 주는 건 아니다. 자식이 있으나 없는 것보다 못한 경우도 수도 없이 보았다. 

그리고 반대로 자식이 없다고 해서 말년이 무조건 비참하고 외로운 것도 아니다. 

결국은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사람이 인생을 힘 있게 살아 나간다. 경험을 통해 그리고 관찰을 통해 알게 되었다. 애초에 인간은 외로운 존재이고 정해진 길은 없으며 모든 선택은 나에게 달렸다. 

내가 만약 그래야 한다면 나는 순간에 집중하겠다. 

이야기의 소재는 성소수자라고 보일 수도 있으나 결국은 노년의 엄마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 모두 늙고 병들고 죽기에 이 이야기가 남일 같아 보이지 않는다는 게 영화의 가장 큰 설득이고 매력이다. 

나는 어떻게 나이 들고 싶은 걸까.

그러한 생각을 한 번 해보게 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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