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게도 역사는 반복된다
부산 국제 영화제에서 미리 공개되어 전반적으로 호평을 받은 영화 전, 란을 이제 넷플릭스에서도 감상할 수 있다. 몇몇 기자 분들이 극장의 큰 화면으로 보고 싶었다고 토로해서 의아했는데 보고 나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가 간다. 작품의 완성도보다는 칼 싸움 장면이 굉장히 아름답게 담겨 있어서 나도 극장에서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생각보다 재미있었다.
박찬욱 감독 영화 제작이어서 크게 기대를 안 했는데 넷플릭스 자본이 들어가니 사극 영화도 이렇게나 멋들어지게 만들 수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실감했고 역시 돈의 힘은 참 대단하다는 걸 새삼 느낀다. 어느 정도 CG가 들어간 장면이 티가 나긴 하지만 거슬릴 정도까지는 아니어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괘념치 않아도 될 정도다.
일단 칭찬부터 해보자면,
액션 장면이나 칼싸움 장면이 정말 예술이다. 보통 칼싸움 장면은 우리 나라 사극에서 이 정도로 아름답게 묘사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압도적이다. 감독과 무술 감독이 이 장면에 얼마나 공을 들인 건지가 초 단위로 보일 정도다. 음향도 좋았던 데다가 촬영도 아름다워서 칼싸움 장면만 따로 편집해서 보고 싶을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역시나 이야기가 생각보다 방대하고 사실과 허구를 섞다 보니 중심을 잡기가 조금 힘겨워 보인다. 보통은 하나의 이야기 안에서 크게 갈등을 하는 세력이 두 팀 정도라면 영화 전, 란 에서는 이러한 굵직한 대립이 생각보다 많이 나온다. 종려와 천영의 대립 그리고 선조와 백성의 대립 마지막으로 일본군과 의병의 대립이 나온다. 세 개의 대결 구도가 다 굵직한 데다가 세세한 갈등 구조를 따지자면 하나의 이야기 안에서 필요 이상의 갈등 구조가 난립해서 솔직한 말로 조금 어지럽긴 하다.
게다가 배우들이 하나같이 다 무게감이 있는 편이어서 이러한 갈등 구조가 너무 방대하게 다가온다. 보면서 역시나 이렇게나 이야기할 거리가 많으면 무리를 해서라도 드라마로 만들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가 2시간이 조금 넘던데 어차피 드라마로 너무 늘리기 보다는 45분 정도해서 6부작 정도 드라마로 만들어서 3시간 정도로 끊었어도 괜찮았을 테다. 그렇다면 캐릭터의 디테일도 살리면서 감독이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마음껏 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그래도 각본은 박찬욱 감독이 써서 그런지 이야기 자체가 탄탄하긴 한데 하나의 영화에 너무나 많은 이야기와 등장 인물 그리고 갈등 구조가 들어가다 보니 따라가기 버겁고 영화 자체도 힘들어 보일 정도여서 그 부분은 조금 아쉬웠다.
뭐 그래도 이야기의 핵심은 단연코 종려와 천영의 관계성이 아닐까 싶다.
허구의 인물들이자 이 영화의 중심인 종려와 천영은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으나 따지고 보면 현대 사회로 이 둘을 데리고 와도 크게 이질감이 없다. 지금 시대와 영화의 배경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겉보기에는 노비도 사라지고 자유와 평등이 다 이루어진 듯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은 곧 돈으로 나타나며 그러한 돈에 울고 죽고 목숨까지 왔다갔다 하는 게 현실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라는 말이 더 이상 비아냥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다.
재판에서 아무리 유죄가 확실하더라도 비싼 변호사를 쓰면 무죄를 받거나 가벼운 형량을 받는 건 우리나라는 물론 전세계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영화 전, 란을 가만히 보면 지금과 저 당시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누구나 하게 된다. 물론 지금은 저 시대처럼 굶어 죽거나 곡괭이를 들고 전쟁에 나가 자신을 그리고 마을을 보호하지는 않으나 그건 우리 나라 사람들의 이야기고 우크라이나나 가자 지구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으로 서민들이 고통받고 있다.
머리 위에서 갑자기 포탄이 떨어지고 식수를 구하지 못해 바이러스에 취약한 사람들이 현재 시대에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그게 나의 이야기나 우리 이웃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 차이일 뿐이다. 특히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가 전쟁의 시대에 잔치를 하지 않겠다고 하는 점은 그런 의미에서 누구보다 우아하고 멋진 행동이었다.
지금 시대에도 노비가 존재한다.
우리는 대기업이나 속한 직장에서 노비라고 볼 수 있다. 사람답게 살게 해주는 건 비슷하지만 자유가 없고 구속되어 늙고 병들기 전까지 철저하게 이용만 당하다가 버려진다. 이 당시 노비도 비슷한 존재였다. 내가 놀란 건 아들의 매질을 대신 받는 노비까지 있었다는 사실인데 생각해 보면 양반의 입장에서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종려는 여린 소년이었기에 천영과 우정을 나누었으나 보통의 사례라면 천영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현대인들도 적당히 사람답게 살고는 있으나 결국 기업의 노비라는 점에서 과거와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적당히 먹고 살게는 해주기에 아무도 폭동을 일으키지 않는 것 뿐이다. 그러나 춥고 배고프면 상황은 달라진다. 북한의 김정은도 실제로는 민심을 굉장히 신경 쓴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무리 포악한 선조라고 해도 백성의 민심을 고려하긴 했을 거다. 당시에는 의병이 선조까지 엎지는 못하였으나 우리 나라는 대통령을 탄핵한 나라이기에 이 민족성이 어딜 가지는 않는다.
우리 나라 역사를 보면 지도자가 잘 해서 나라가 바로 선 적이 사실상 별로 없다. 좋은 지도자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나라의 명운을 바꾼 건 결국 목숨 걸고 나선 민중이었다. 영화에서는 의병으로 표현되어 있으나 우리 나라 역사를 봐도 이런 식으로 힘 없고 가진 거 없는 민중들이 일어나서 나라를 개혁한 사례가 굉장히 많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도 비슷한 시각으로 볼 수 있다.
슬프지만 종려와 천영의 관계에서도 볼 수 있듯이 모든 사람이 행복하고 만족하는 시스템이라는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인도는 여전히 카스트 제도가 존재하는 나라인데 가장 낮은 단계의 계급 폐지를 제일 반대하는 건 최상류층이 아니라 그 바로 위 계층 사람들이다. 인간은 한 번 계급을 나누면 처음에는 부당하다고 생각하지만 이내 적응하고 살아 간다. 어느 정도 먹고 살게만 해주면 폭동을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살아간다.
이걸 알기 때문에 전세계 그 어느 지도자도 나라 경제가 망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정권을 잃고 실각하기 때문이다. 독재자들에게는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래도 겉으로라도 민주주의 시스템을 유지하는 나라들은 경제와 민심에 신경을 쓴다. 그렇지 않으면 결과는 파멸 뿐이다. 오히려 선조가 이 정도로 오래 살아 남은 게 신기할 따름이랄까.
영화 전, 란은 욕심이 많은 영화다. 많은 걸 품으려다가 오히려 세세한 부분에서 구멍을 보여준다. 그래도 충분히 흥미로운 이야기이기에 칭찬을 해주고는 쉽지만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오히려 드라마로 조금 더 각본을 촘촘하게 직조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들었다.
총평
그래도 이 정도면 준수하다.
평범
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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