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박함은 한계를 망각하게 만든다.
나치 관련 영화는 항상 재미있다.놀라울 정도로 못 만들지만 않는다면 기본 이상은 하는 법이다. 심지어 좀비 관련 소재로 나치 영화를 만들어도 재미있다는 게 어느 정도 증명이 될 정도가 아니던가. 영화 페르시아어 수업은 실화를 기반으로 만든 영화인데 재미있는 건 영화 시작 즈음에 이 영화는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하면 기본적으로 상상 이상으로 각색이 많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이 영화는 실화와 전혀 상관없다고 굳이 영화 초반부에 알리는 영화야말로 진정으로 실화에 바탕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 재미있는 부분이다. 특히 영화 페르시아어 수업은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각색이 상당히 많이 들어간 부분이 있다는 점을 인정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영화 자체는 쫄깃하게 잘 만들긴 했는데 온전히 실화라고 받아 들이기이에는 판타지스러운 부분이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분명히 신선하다. 이런 영화를 이전에도 이후에도 보기 어려울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런 독특한 소재의 나치 배경 영화를 이리도 신선하게 만들 수 있다니 각본과 연출의 승리라고 할 만하다. 전쟁 영화도 아니고 그렇다고 포화 속에 피어난 사랑 영화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게다가 잔인한 장면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스릴러 영화보다 심장을 더 쫄깃하게 죄어온다.
페르시아어 수업을 해야만 살아 남을 수 있는 유대인 남자 질과 어느 정도 나치가 멸망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대위 코흐의 기묘한 우정에 대해 다룬 영화 페르시아어 수업은 이전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영화라고 단언할 수 있다. 생각보다 알려지지 않은 영화인데 넷플릭스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감상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영화가 현실을 반영하느냐고 묻는 분들이 있을텐데 당시 유대인 수용소는 사실 눈가리고 아웅이었고 독일군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유대인을 죽일 수 있을지 항상 고심했었다. 보는 눈만 없다면 유대인 살상은 벌레 죽이는 것보다 더 자주 벌어지는 일이었고 유대인만이 아니라 러시아를 비롯한 전쟁 포로나 심지어 자국민들 중에서도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건가 다운증후군 신드롬을 가진 사람들도 실험체로 쓰거나 많이 죽인 걸로도 유명하다. 유대인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건 아닌데 한 인종 자체를 청소하려 했다는 사실 덕분에 아직도 나치군이 유대인만 죽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기에 질에게 페르시아어는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도구였다.
한 마디로 언어를 아니 언어 시스템 자체를 만들어야 하는 불가능한 미션을 수행해야 하는 게 바로 질의 위치인데 당시 페르시아 사람이 나치 수용소에 올 일은 없다 보니 어찌 보면 질이 살아 남는 데에 운도 크게 작용했으리라 본다. 물론 마지막에 페르시아 출신 영국 군인이 오기는 하지만 질이 베푼 은혜를 갚기 위해 다른 유대인이 그를 살인하게 되면서 어찌 되었든 질은 목숨을 구한다.
그렇다면 왜 코흐 대위는 그토록 페르시아어를 배우고 싶었던가.
전쟁이 마무리되면 동생을 보러 간다는 명분이 있기는 하지만 아마도 독일인인 코흐 대위 역시 이 전쟁이 정상이 아니라는 걸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 전쟁터에서 취사를 담당하는 것도 그러하고 연애나 결혼도 전혀 하지 않는 걸 보면 나치 내에서 정착하려는 의지가 아예 없었고 스스로도 이를 원천 차단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글씨를 못 쓴다고 부하를 다그친 것 역시 실제적으로 부하의 글씨 때문이라기 보다는 부하에게 마음이 흔들리는 자신을 미리 차단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보인다.
코흐 대위는 어떻게든 이란 테헤란에 가서 동생도 만나고 자신이 잘 하는 요식업도 하기 위해 미리 준비를 하고 싶은데 당시 페르시아어 관련 교제가 제대로 나온 시절도 아니었고 주변에 페르시아인도 없고 해서 유대인 중에서 페르시아어를 한다는 질을 찾아낸 건데 확인할 방법이 아예 없다 보니 코흐 대위 역시 감쪽같이 속아 버렸고 질 역시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물론 위기가 한 번 오기는 한다.
빵과 나무를 의미하는 단어를 질이 헷갈리면서 열심히 공부를 해온 코흐 대위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거짓말 잘 하는 유대인이라는 정서가 만연하던 시대에 자신을 속이던 게 들통나 버렸기에 그러한 것일텐데 이후 코흐 대위는 차마 관계를 이어온 질을 바로 죽이지는 못 하고 힘겨운 노동을 통해서 괴롭히게 된다. 아마도 죽이지 않은 걸 보면 코흐 대위 역시 어느 정도 질과 우정을 인정한 건데 이게 과연 질의 입장에서도 우정일지는 의문이긴 하다.
나치 배경 영화를 보면 나치 군인들은 무언가 비이성적이고 광기에 어린 모습을 볼 수가 있으며 영화 페르시아어 수업에서도 비슷한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그런데 당시 상황을 상기해 보자면 유대인이라는 거의 벌레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사람을 부리는 사람들이 바로 나치 군인들인데 이러한 군인들이 정상적인 인권 인식을 가지고 있기를 바라는 거 자체가 판타지일 수가 있다. 그들에게 유대인은 노비만도 못한 존재였을 테고 기분 나빠도 죽이고 기분이 좋아도 죽일 수 있는 그런 존재였기에 이들이 정상적인 행동을 하고 사고를 하기 바라는 거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볼 수 있다.
비슷한 예라고 보긴 어렵지만 그래도 유사한 예로 부모에게 한 번도 혼나지 않고 자란 아이를 들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정확한 비교는 아니겠으나 부모에게 너무나 많은 관대함을 받고 자란 아이가 엇 나가고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안하무인의 성격으로 자라는 건 지겨운 클리셰가 아니던가. 당시 나치 군인을 통제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고 그들이 인간답게 행동하기를 바라는 거 자체가 헛된 기대라고 할 만하다. 코흐 대위가 그나마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정도인데 그 코흐 대위도 결국 질을 하나의 도구로 인식했을 뿐 아닌가. 물론 코흐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우정을 쌓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렇게 힘겨운 노동을 하던 질은 결국 쓰러지게 되고 전략적인지 아니면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자신이 직조한 가짜 페르시아어를 웅얼거리게 된다. 이를 들은 부하 군인이 코흐 대위에게 이를 알리면서 코흐 대위는 사경을 헤매는 질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며 질의 진심을 깨닫게 된다. 내가 보기에 질이 죽음 앞에서 머리를 써서 가짜 페르시아어를 지껄인 거 같지는 않고 하나의 언어 시스템을 만들면서 본인도 본인을 속이는 지경 혹은 경지에 이른 거 아닐까 합리적인 의심을 해 본다.
그렇게 다시 코흐 대위에게 다시 가짜 페르시아어를 가르치면서 질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고 그로 인해 자신과 잠을 같이 자는 수용소의 다른 유대인들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의 정해진 수순 즉 죽음으로의 결말을 보면서 자신도 목숨을 포기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그 순간에 마치 거짓말처럼 코흐가 질을 구하러 오고 이때부터 이게 연인 사이인지 우정인지 의심이 되기 시작한다. 어찌 보면 코흐에게 질은 연인 그 이상의 존재였으리라. 연인이자 친구 그리고 선생님의 위치에 오른 유대인이라니 그야말로 너무나 판타지 스럽지 않은가.
그렇게 목숨을 건진 질은 독일군 패망 직전에 코흐 대위 덕분에 목숨을 건지게 된다. 실제로 유대인 수용소에 있는 인원들은 독일 패망 직전 나치 군인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우리 나라의 위안부 여성들이 일본 패망 직전에 죽임을 당한 것과 비슷한 이치라고 볼 수 있는데 어찌 보면 일본도 독일 만큼이나 악랄한 짓을 많이 저질렀는데 아시아 나라라는 이유 하나로 생각보다 주목을 받지 못 한 게 조금 억울하긴 한다.
그렇게 목숨을 건진 질은 본인이 페르시아어를 만들기 위해 연상법으로 이름을 외운 2480명의 희생자 이름을 줄줄이 읊으면서 영화를 막을 내린다. 사람이 저렇게나 많은 이름을 외우는 게 가능할까 싶으나 연상법을 따르면 사실 불가능한 일도 아닌 데다가 질은 살기 위한 절박함으로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였고 그렇지 않으면 죽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코흐 대위는 적절한 최후를 맞이 한다. 결국 이란 테헤란 공항까지 가는 데에는 성공하지만 질이 가르친 엉터리 페르시아어를 쓰다가 독일인으로 의심받고 결국 공항에서 체포되기에 이른다. 영화 자체에서 사이다 장면이 별로 안 나오긴 하는데 이 장면 만큼은 사이다가 아닐 수 없었다.
나치 관련 영화는 그야말로 마르지 않는 화수분같은 존재인데 현대사에서 히틀러같은 인물이 다시 한 번 나올 수 있을지는 조금 의문이긴 한데 지금 유럽이나 여러 나라에서 극우주의가 발발하는 걸 보면 제 2의 히틀러 등장도 무리는 아니겠다 싶어 씁쓸하긴 하다. 애초에 민주주의와 투표라는 개념 자체가 인기에 기반하고 사람은 이성적인 동물이 아니기에 괴물같은 지도자가 강대국에서 다시 나온다고 해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닐테다. 게다가 다들 히틀러를 교훈 삼아 그 정도로 미친 짓은 하지 않고 있는데 러시아의 푸틴과 중국의 시진핑을 보면 히틀러의 진화형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 거짓말같은 이야기가 실화라는 게 너무 놀랍고 이걸 또 기가 막히게 표현한 감독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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