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한데도 달달하다
윌 글럭 감독은 참신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아니다.흥행작도 많고 좋은 영화도 많이 만든 감독이지만 로맨스 장르에서 신선함을 제공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더 안타까운 건 새로움을 제공했다고 해서 흥행 면에서 항상 좋은 성적을 기록하는 것도 아니다. 유명한 드라마 작가 김은숙도 말하지 않았던가.
남의 돈으로 예술하는 거 아니다.
하지만 몇몇 대단한 천재 감독들은 예술 하면서 돈을 벌기도 한다. 하지만 그게 아주 소수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드니 빌뇌브나 봉준호 감독 정도가 아니라면 예술 하면서 돈도 버는 건 거의 불가능한 영역에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니 이런 영화를 볼지 말지 고민할 때 평론가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을 필요는 없다.
뻔하고 클리셰가 넘친다고 해도 결국 재미있느냐 없느냐만이 중요할 뿐이다.
로튼 토마토 전문가 지수가 높지 않은 이 영화 페이크 러브의 원제는 ANYONE BUT YOU 인데 영화를 보고 나면 페이크 러브도 그리고 영어 원제목도 영화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아무래도 개인적으로는 영어 제목이 영화의 핵심을 제대로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극장 개봉도 하지 못한 영화에게 많은 걸 바라지 말도록 하자.
왜 이 영화가 한국에서 개봉을 못 했던 건지는 모르겠으나 아무래도 한국 영화 시장에서 로맨틱 코미디 장르가 흥행하기가 굉장히 어려운 게 현실이고 이름만 대면 알만한 유명 배우가 나오는 것도 아니니 그럴 만도 하다. 영화 탑건 매버릭으로 유명세를 탄 글렌 파월이지만 행맨 역할 자체가 조연에 불과했고 영화에서 아무리 화제가 되었다고는 해도 배우의 얼굴과 이름을 매치시키는 관객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결국 탑건 매버릭은 톰 크루즈이 영화가 아니었던가.
다행스럽게도 북미에서는 대단한 흥행 몰이를 기록했다. 예산이 많이 들어가지 않은 영화이고 영화 보시면 알지만 호주 시드니 관광청으로부터 압도적인 지원을 받아 제작된 영화여서 예산을 더욱 아낄 수 있었다고 보여지는데 노골적인 시드니 홍보 영화치고는 크게 거슬리지 않는다는 점도 장점이다. 호주 시드니를 몇 번이나 가보았으나 이 정도로 아름다운 도시인 줄은 몰랐는데 시드니를 한 번도 안 가본 사람들은 한 번 혹할만해서 시드니 관광청이 헛돈을 쓴 건 아니구나 싶었다.
일단 영화 페이크 러브, 재미있다.
순수하고 맑고 해맑은 이 영화는 거슬리는 부분없이 준수하게 나왔다. 각본이 조금 멍청해 보이긴 하지만 이런 영화를 보러 극장을 가는 사람들에게 세상의 근심을 다시 한 번 환기시키는 것도 눈치가 없는 일이다. 비슷한 영화를 골백번 봐야 하는 평론가들에게는 또 비슷한 영화가 나왔다고 한숨이 나올수도 있으나 일년에 극장을 몇 번 가지 않는 일반 관객들에게는 이런 영화가 오히려 숨통을 틔워준다.
뻔해도 재미있으면 된다.
영화 틀자마자 결말이 바로 보이는 영화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나는 이런 영화를 재미있게 만드는 게 더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다. 이미 관객이 결말까지 선하게 보이는 상황에서 어떻게 집중력을 유지할 지가 관건이다. 내용이 예측이 안 되는 경우 오히려 긴장감을 유지하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하지만 이렇게까지 결말이 거울처럼 선하게 보이는 영화는 오히려 더 어렵다.
어느 정도 빈틈이 있고 구멍이 많기는 하지만 그 빈틈을 메꾸는 건 역시나 배우들이다.
모든 배우들이 매력적으로 나오지만 특히 주연을 맡은 시드니 스위니와 글렌 파월의 매력은 하늘을 뚫고 승천할 정도다. 두 배우의 매력이 이븐하게 동등한 데다가 같이 붙어 있을 때에조차 케미가 워낙에 좋아서 실제로 홍보할 때 열애설이 난 것도 이해가 갈 정도다. 지금 생각하면 영화의 흥행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연출한 게 눈에 보이긴 한데 서구권에서도 꽤나 화제가 된 걸 보면 이런 전략이 어느 정도 먹혔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대규모 개봉을 하는 영화의 주연을 맡은 배우들은 부담감이 상당하다. 유명한 할리우드 흥행 배우 역시 영화 개봉 전에 흥행에 참패할까 봐 잠도 제대로 못잤다고 고백한 전적이 있을 정도다. 특히 한창 떠오르는 배우 같은 경우 이러한 부담감은 더하다. 아마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라고 했다면 그렇게 했을 테다. 둘의 열애설이 조작되었고 비지니스 관계라고 비난한다고 해도 이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거다.
역시나 영화는 흥행했고 보고 나니 왜 흥행한 건지 충분히 납득이 간다.
혐오스러운 관계로 시작해서 서로에 대한 진심을 깨닫고 사랑을 확인하는 이런 비슷한 영화는 그동안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많이 나왔으나 매력적인 작품은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페이크 러브는 보는 내내 행복한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은 영화와 굉장히 동떨어진 상태여서 영화의 밝은 기운이 내 삶과 전혀 비슷한 지점이 없으나 영화를 보고 있으면 무엇에 취한듯 내 인생도 밝아질 거라는 막연한 기운을 받는다.
그러한 기운 자체가 영화가 가지는 크나큰 매력이다.
아무리 개연성은 개나 주고 저 비싼 헬리콥터 구조대가 빈번하게 나오는 상황이 현실에서 과연 발생할 수 있느냐의 문제는 관객에게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우리도 그 덕에 호주의 아름다운 바다 풍경을 크나큰 스크린으로 한 번 더 볼 수 있는 거 아니겠나.
두 시간 남짓동안 행복한 기분을 선사하는 이 사랑스러운 영화를 추천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넷플릭스로 보고 나니 괜시리 큰 스크린에서도 보고 싶어질 정도였는데 추억의 중년 배우들이 조연으로 많이 나와서 나같은 나이대의 관객에게는 또 다른 추억 선물이 되기도 했다.
그나저나 이제 미국 영화에서 레즈비언 커플의 결혼식은 더 이상 새롭거나 충격적인 소재가 아니구나라는 점을 새삼 느끼게 된다.
평점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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